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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시실

해방전의 생활

일본에 건너 온 조선인은 1925년에는 13만명이 넘었으며 1930년에는 42만명에 달했습니다. 그후에도 매년 수만명씩 늘어났습니다. 대부분 직업은 토목건설업, 공업, 운송업 등의 노동자였습니다. 그 밖에 노점상, 행상, 가게 주인 등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집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천이나 매립지 등에 자신들의 부락을 만들어 지냈습니다. 일본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서 서로 돕기 위해 동포들이 모여 이윽고 각지에 많은 '조선인 마을'이 형성됐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고추와 마늘 등의 냄새가 나고, 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성이 돌아다니며 일을 알선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조선어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후 일본이 전시 체제로 들어가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화할 때까지 민족적인 삶은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도쿄 타이헤이쵸의 야채 가게(1920년대)

도쿄 쵸후쵸의 조선인 마을(1930년대)

온돌방의 재현

온돌이란 부억 등에서 조리할 때 나오는 배기열을 이용하는 마룻바닥 난방입니다. 조선반도와 중국 동복지방에서 옛부터 보급돼 왔습니다.

조선에서는 어느 집에나 있었지만 1920년대, 1930년대에 일본에 건너 온 조선인 가운데에는 스스로 온돌방을 만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겨울이 매서운 도호쿠 지방과 호쿠리쿠 지방에 많았다고 합니다. 도쿄의 쵸후시, 카나가와현 카와사키시에도 온돌방이 있었습니다. 자료관에 생활용품 등을 기증해 준 배말주(裵末珠, 미야기현 거주)씨는 "태어나 자란 카와사키 집에는 어머니가 만든 온돌방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1930년대의 온돌방(재현)

계승되는 풍습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건너 온 1세가 줄어들어 2세, 3세, 4세가 대부분이 된 재일사회에 있어 짙게 남아 있는 풍속이 관혼상제입니다. 장례에 삼배로 만든 상복을 입는 사람이 적지 않고, 3·4세의 결혼식에는 민족 의상을 입은 신랑 신부를 자주 보게 됩니다.

재일코리안의 각 가정에서 가장 폭넓게 계승되고 있는 풍습이 제사입니다. 제사는 선조를 공경하는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민속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월과 추석, 부모·조부모의 명일에 직계 종친의 집에 가족, 친척이 모여 제사상을 차려 선조에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가족의 일체감을 확인합니다. '제사를 하지 않는 집은 없다'고 할 정도로 재일동포들은 이 풍습을 긍정적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재일2세의 결혼식(1961년)

1930년대의 제사상과 병풍

해방후의 생활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은 의식주에서 교육까지 모든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1952년 통계에서는 61%가 무직으로 취직자 가운데 가장 많은 6.6%가 일용 노동자였으며 그 밖에 페품수거, 혼잡한 밤 기차를 타고 식료품을 사는 일, 암시장에서 통제 품목을 사고 파는 일, 나무판 한장에 상품을 늘어놓고 파는 노점상, 행상, 밀조주 제조, 엿장수, 돼지 사육 등 살아가기 위해 재일1세는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자료관에는 1세들이 생활에 사용했던 빨래 방망이, 놋그릇, 요강, 향로, 탕파, 주전자, 화로, 도시락통, 주판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재일동포가 사용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져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생활 용품을 만져 볼 수 있는 코너

밀조주에 관한 포스터(194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