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전시실
해방 그리고 귀국과 잔류
1945년8월15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으로 일본이 항복해 조선인은 조국의 광복·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거류하는 조선인은 200만명이 넘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에 들뜬 재일은 구름때처럼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다시 일본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도를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돼 대립이 격해지고, 콜레라 발생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활고, 불안정한 조선 사회 정세 등의 정보가 흘러들어오자 잠시 일본에 머무르면서 상황을 지켜보자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또, 이미 고향에서 생활 기반을 잃은 사람들과 성공해서 고향에 기여하겠다는 사람도 나왔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약70만명이 일시적으로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갖고
해방을 맞이한 조선인은 희망에 찼습니다. 1945년10월에는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돼 귀국 사업의 원활한 추진과 생활권을 지키는 운동, 아이들에 대한 민족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신문과 잡지 등의 출판 활동이 활성화되고 문학 동인지를 비롯해 다채로운 문화 활동이 각지에서 펼쳐졌습니다.
특히 1세들은 황국 신민화 교육을 강요받은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뜻을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를, 힘이 있는 자는 힘을, 돈이 있는 자는 돈을!'이라는 구호로 나타냈습니다.
동포의 집에서, 부엌에서, 일본학교의 교실에서 '국어 강습소'로 시작됐습니다. 이윽고 동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교사가 각지에 세워져, 산수, 역사, 지리, 음악 등 과목도 늘어났습니다. 교재도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불과 몇년 사이에 일본 전국 600군데에 민족학교가 세워져 약6만명의 어린이들이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검지의 자유를
1947년5월2일 재일조선인을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외국인등록령(칙령=법률이 아닌 구헌법 아래 마지막 명령, 흔히 '천황의 마지막 방귀'라고 한다)이 공포되어 샌프란시스코 조약 발효후(1952년4월)에는 외국인등록법이 됐습니다.
이 법률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지문날인 제도(14세 이상, 1982년 16세 이상으로 변경)였습니다. 3년에 한번 양쪽 손 10 손가락의 지문을 모두 채취했습니다.
1980년9월 도쿄에 사는 한종석(韓宗碩)씨는 지문 날인을 '굴욕의 낙인'이라며 거부했습니다. 이는 당초 '단 한 사람의 반란'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공감의 띠가 넓어져 일본인도 함께하는 1980년대의 일대 시민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검은색 잉크를 수용액으로 바꾸고 날인을 생애 1회로 한정하는 등 자잘한 '개정'으로 모면할려고 했습니다. 2000년4월 드디어 외국인등록법의 지문 날인이 전면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등록증의 상시 휴대 의무 및 벌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활약하는 사람들
일본 사회 각방면에서 활약하는 재일코리안은 많습니다.
특히 예능계와 스포츠계 등 능력 그 자체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분야에서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프로야구에서는 '재일코리안계 사람들로 최강의 구단을 만들 수 있다' 든가 'NHK 홍백전은 재일코리안이 없으면 성립될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편견이 너무나 강해 출신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반면, 코리안임을 숨기지 않고 문학계, 의학계, 학계, 경제계, 에술계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프로야구 해설자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 작가 김석범(金石範), 시인 김시종(金時鐘), 학자 강상중(姜尚中), 가수 와다 아키코(和田アキ子), 소프트뱅크 사장 손정의(孫正義) 등 이름을 대면 끝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