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전시실
일본으로의 도항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무단통치를 한 일본은 강압적인 토지조사사업(1911~1918)을 통해 조선인 가운데 대다수를 점했던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았습니다. 그후 거액의 자금을 요하는 수리사업에 따른 산미증식계획(1920년)은 농민의 이농 현상을 가속시켰습니다.
조선에서 살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에서 일자리를 얻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조선의 가족을 불러들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는 매년 8~15만명의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나아가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일본의 아시아 침략 전쟁에 따라 탄광과 광산, 군수 공장과 토목공사에 강제적으로 동원된 조선인이 급증했습니다.
일본으로의 도항에는 주로 관부연락선(부산-시모노세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제주-오사카, 여수-시모노세키, 부산-하카타 등의 항로가 이용되었습니다.
칸토대진재의 수난
1929년 9월 1일 카나가와 사가미만에서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도쿄,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피해지역에서 10만명 이상의 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가 나왔습니다. 이 혼란에 편승해 조선인을 대량 학살(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추정은 6,500명)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칸토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입니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안에 독약을 넣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이런 유언비어를 이유로 계엄령이 발포됐습니다.
"'15엔 50전'을 말해봐라". 이는 검문에서 했던 질문입니다. 한국 말에는 탁음이 없어 제대로 발음 못하는 사람을 조선인으로 식별한 것입니다. 계엄병과 순사, 자경단 등이 거리에 비상 라인을 깔고 검문해 마구잡이로 거리에서 조선인을 학살한 것입니다.
희생된 많은 조선인의 영이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건 발생 이래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조사한 적도 사죄한 적도 없습니다.
강제연행
중일전쟁(1937년 7월)을 계기로 일본은 아시아 대륙 침략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일본은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등을 공포하고 총동원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일본 청년들을 군인으로 전쟁터에 보내고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에서 많은 사람을 일본에 데리고 왔습니다. 1939년 가을에 시작된 노동 동원은 당초 '회사의 개별 모집'에서 태평양전쟁 발발후에는 '관 알선'으로 강화됐습니다. 전쟁 말기에 이르자 무조건적인 '징용'으로 바뀌었습니다.
총 72만 명 이상이 조선에서 일본 국내, 남사할린, 남태평양 군도로 연행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약 반수는 탄광에, 나머지는 광산, 토목공사, 공장, 항만 하역, 농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젊은 여성은 종군위안부로 젊은 남성은 군속으로 중국 대륙, 동남아, 남태평양 군도에 연행되었습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 타지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황국신민화 교육
중일전쟁 발발(1937년 7월) 후에 일본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 교육이 강화됩니다. 치마 저고리를 입거나 조선어로 이야기하거나 조선 이름을 쓰는 일이 서서히 없어져 갑니다.
협화회(協和会. 쿄와카이)가 1939년에 조선인을 일본의 전시체제로 편입시켜 통제하는 전국 조직으로 변모하자 경찰권력의 힘으로 조선인을 관리했습니다. 신사 참배, 국방 헌금, 노동 봉사, 일본어 강습, 기모노 착용 등을 강요했습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1940년2월11일 시행)을 실시해 조선인의 이름을 빼앗았습니다. 김 씨가 카네다 씨가 되고 장 씨가 하리모토 씨가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게 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서사'(1938년11월)에는 "(생략)2, 우리들은 한마음으로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천황의 적자'로 목숨을 바칠 것을 교육한 것입니다.